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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직장 그만두고 왜 왔어요?" 1화 대충 멍청해 보이기로 했다
    LA 부부 생존 영수증 2019. 2. 20. 15:13

    <남편 편>


    잔악한 인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미국 동부 바하마 군도를 발견한 건 1492년 10월 12일이다.  닐 암스트롱이 아폴로 11호를 타고 인류 최초로 달 표면에 착륙한 것은 1969년 7월 16일이다. 자고로 위인은 날짜로 기억되는 법이다. 나는 2017년 4월 25일 LA 국제공항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해 4월까지 나는 방송기자였다. TV에 얼굴이 나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은 복잡한 인간이었다. 장애인 단체를 이끄는 페이스북 친구는 나를 "기자라기보다 왠지 모를 수줍음이 있는 사람"이라 표현했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염치였다 생각한다. 취재 보도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지역 뉴스의 한계, 시각 자료 위주로 만들어내는 TV 방송 뉴스의 보수성, 그것에 내 얼굴을 내보내는 건 전파 낭비라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좋은 직장 그만두고 미국은 왜 왔어요?"


    LA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아메리칸드림은 없다고 했다. 내가 소년 같은 꿈만 좇는 피터팬으로 보였나 아니면 빚을 지고 야반도주한 실패자로 보였나 자문했다. 아내를 방패 삼았다. "와이프가 오자고 해서 그냥 왔어요" 탁월한 답변이었다. 대충 멍청해 보이면서 향후 예상되는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교묘한 회피술이었다.


    첫째 영어를 배우고 싶었다. 3년 전인가 광화문에서 젊은 백인이 말을 걸어 황급히 도망 간 적이 있다. 씁쓸한 트라우마다. 그러나 LA 한인타운에서는 영어가 딱히 필요 없다. 한국 회사에서는 더욱이 영어에 노출되는 일이 드물다. 거기다 최근 렌터카 회사에 가서 차를 빌리러 갔다가 한인 1.5세로 보이는 직원이 "영어가 이상한데 한국말로 하세요"라고 했다. 젠장, 니 얼굴 딱 봐 뒀어. 둘째 그냥 외국에 살고 싶었다. 뭔가 쨍하니 멋져 보이지 않는가. 뉴요커, 파리지앵은 아닐지라도, 나 외국물 먹은 남자야. 그러면서도 혹시나 공부할 길도 열리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도 했다. 셋째, 가족과 최대한 멀리 있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다. 종종 나는 갈등 유발자였기에.


    무엇보다 2010년부터 일했던 충북 청주를 떠나야 했다. 더 오래 있다간 끓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죽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스러질 것이 분명했다. 언제부터인가 이미 진보와 혁신, 원칙주의, 저항정신을 담당했던 뇌세포들은 집단 자살하고 있었다. 때로는 더 좋은 뉴스, 더 강력한 이슈를 원했고 특종을 해 광채가 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나 조직 속에서 홀로 꾼 꿈은 수확하지 못한 채 그대로 썩어버렸다. 주위를 둘러봐도 생각을 공유할 친구가 없었다. 4~5년쯤 지나서야 서서히 뜻이 맞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떠나고 싶었다.


    미국 이직을 결정하고 머릿속으로 회고록을 써봤다. 무엇을 실패했고 무엇을 얻었는가. 아침 기상과 함께 하루 천 번은 그만두고 싶었던 그 죽일 놈의 직장에서 말이다. 나는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나름 목표로 삼았던 기자상도 거머쥐었더랬다. 결론은 쉽게 나왔다. 과보다 공이 많았다. 쓸데없이 나를 몰아세우고 채찍질했다. 될 일은 될 것이고 안 될 일은 발악해도 안 될 것이다. 양변기에서 힘을 준다고 똥이 나오지 않지 않은가. 치질만 생길 뿐. 이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긍정할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LA 한인타운에서 삶의 보따리를 풀었다. 복잡하지 않고 분수를 인정하며 담담히 살아보려 한다. 이곳은 유토피아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다. 청주 같은 삶도 있을 것이고 서울 같은 삶도 있을 테다. 잘 살아 보겠다. 응원을 기다린다. 나는 바로 너이기에. LA 부부의 생존 영수증, 문을 연다.



    LA 다운타운 인근에 위치한 리틀 도쿄의 유명 라멘 가게다. 아내가 한 시간 반째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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